여러분은 세계 최고의 밴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알고 계신가요? 아마 그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신 분이라면 그를 기억하실 수도 있겠네요! 프레디 머큐리는 록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퀸의 보컬리스트로 유명한 프레디 머큐리는 활동 당시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에이즈에 걸려 일찍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는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보컬리스트이기에,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18위에 들었고,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계신 것도 있겠지만, 아마 새로운 사실들을 더 발견하실 수 있으실 거에요! 다음 장으로 넘어가 계속해서 기사를 읽어보세요.

록밴드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
어린 시절의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는 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안에 위치한 섬인 잔지바르에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록스타들과는 달리 유럽계 백인이 아닌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입니다.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이지만, 아시아 계통의 이름을 들키지않기 위해서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을 하였죠. 이러한 배경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를 인도인이나 탄자니아 사람이 아닌 이란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프레디 머큐리 본인은 그런 혈통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탄자니아 출신이면서도 그쪽 사람들을 외면했고 이슬람 압제에 떠난 파르시 집안이지만, 무스타파같은 ‘알라가 너를 위해 기도할거야.’ 같은 가사도 만드는 등 혈통에 대해 초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린 머큐리는 잔지바르의 영국의 개신교 교파인 성공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죠.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과연 이 선택이 프레디 머큐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어린 시절의 프레디 머큐리
인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프레디 머큐리
부모님의 결정으로 인해,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판치가니의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모든 종교의 학생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들였으며 기본적인 성경공부와 채플 외에는 학생들의 종교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당시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학생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음악에는 일찍이 두각을 보여서,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교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습니다. 음악 외에도 미술과 스포츠를 잘했고, 특히 탁구와 복싱은 교내 챔피언이었죠.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에 따르면 프레디의 인도 유학은 끝이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듯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막바지 즈음에는 성적도 확 떨어지고 프레디 본인도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하네요.

인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프레디 머큐리
인도에서의 삶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딱히 큰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프레디의 동창들은 그를 밝고 좋은 아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에게 대화를 걸지 못하는 쑥맥도 아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고루 친구를 사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달링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습관은 그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죠. 훗날 그의 컴플렉스가 되는 뻐드렁니도 그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네요. 프레디의 동창들은 프레디를 버키(영어로 뻐드렁니)라는 별명으로 부르고는 했는데, 프레디 머큐리는 그런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안았던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의 삶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64년에 술탄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층인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들이 수천명 가량이 흑인에게 학살되고 살아남은 자들도 재산의 절반 가량을 압수당하는 조건으로 해외로 추방되었죠. 이로 인해 부유하던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상당수의 재산을 빼앗기고 프레디와 함께 잔지바르를 떠날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후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지게 되었죠.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죠. 그 후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아무래도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 봐.’라고 말했었습니다. 이 후, 이 결정이 신의 한 수가 될지 그 누구도 몰랐죠!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
뮤지션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죠. 그리고 그런 파티에서 프레디가 기타를 연주하며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인터뷰에서 존 레논에 대해 레논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고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 그를 무척 존경한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죠. 퀸의 정규 10집 앨범에서는 존 레논에 대한 헌정곡을 직접 써서 수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프레디는 지미 헨드릭스의 광팬이었죠. 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관람하기도 했고, 직접 그린 지미 헨드릭스 드로잉이나 그에 대한 논문도 팔았다고 하네요!

뮤지션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프레디 머큐리
팀메이트를 찾게 된 프레디 머큐리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이후 팀 스타펠이 다른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습니다.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 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퀸이 탄생하게 되었죠.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합니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쟤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 식으로 웃어 넘겼다는 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습니다.

팀메이트를 찾게 된 프레디 머큐리
다른 성격을 보여줬던 프레디 머큐리
퀸이나 프레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주 나오는 증언 중 하나가 무대 위의 프레디와 일상 생활 속에서의 프레디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죠. 무대 위에서는 다이나믹한, 굉장히 쾌활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면 일상 속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합니다. 프레디가 죽은 이후 애인이었던 짐 허튼이 방송에 나와 증언하기로 일상 생활 속의 프레디는 ‘내성적인 보통 사람’이었다고 했죠.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보아도 일상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며 복잡한 사연을 가진, 알 수 없는 부문이 있는 그런 외로운 인물이었다는 식의 말이 종종 나옵니다.

다른 성격을 보여줬던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와 밴드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유명세를 탔었죠.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말했죠.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습니다.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습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와 밴드
퀸으로 결정하게 된 밴드명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이라고 하네요! 해당 로고는 4, 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밴드 이름을 ‘퀸’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습니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하네요.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퀸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퀸으로 결정하게 된 밴드명
무대조명과 의상에 큰 신경을 썼던 프레디 머큐리
퀸 초기의 프레디는 무대조명과 의상에 유난히 집착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 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하네요!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퀸 초기에는 글램 락의 영향을 받아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강한 인상과 큰 얼굴을 가진 것치고는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습니다.

무대조명과 의상에 큰 신경을 썼던 프레디 머큐리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한 프레디 머큐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1집을 녹음하면서 장난 삼아 “로네츠(The Ronettes)”의 “I Can Hear Music”을 녹음했던 적이 있습니다. 의외로 녹음 퀄리티가 좋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때 본명을 쓰지 않고 ‘Larry Lurex’ 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고 하네요. 물론 당시에 프레디는 무명의 가수였기 때문에 본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도 사실상 묻혔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프레디가 무명 시절에 녹음했던 앨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하네요. 젊은 시절 프레디의 미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며, 이 중 Goin’ Back은 1995년 15집 앨범의 수록곡 Mother Love의 끝부분에서 등장합니다. 데뷔 앨범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린 후 노래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 일쑤였죠. 이로 인해, 프레디 머큐리는 언론과의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 지향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한 프레디 머큐리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었던 프레디 머큐리
무엇보다 프레디는 여러모로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습니다. 일단 인종 측면에서 보자면 프레디 본인이 유럽인이 아니었죠. 프레디는 인도계 파시족, 즉 영국에서도 차별받기 쉬운 아시안 인종이었고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멀리 있는 잔지바르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파시족 혈통은 그 시절 온갖 차별과 혐오를 받기에 충분했죠.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인종차별, 혐오 범죄가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데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요. 프레디의 절친했던 친구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인종차별로 인해 인기를 얻지 못했다”라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해석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활동했던 1970년대 중후반에 흑인에다가 시각장애인이기까지 한 스티비 원더가 무려 3번이나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이전으로 올라가자면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뮤지션은 흑인보다도 오히려 백인에게서 더 인정받는 뮤지션이었습니다.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었던 프레디 머큐리
언론의 악평을 받은 프레디 머큐리
게다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이 있었던 마당에 양성애 성향도 있었으니, 언론에서는 더없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셈. 프레디가 언론과 평론가들을 불신했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특징을 이유로 공격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나중에 프레디도 평론가들의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했는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후문도 있다고 하네요.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록 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사실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죠.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네요.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동시대 영국 밴드들에 비해 유럽적인 감성이 짙은 퀸의 음악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습니다.

언론의 악평을 받은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 실력
프레디 머큐리의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을 토대로 비성과 구강 공명을 적절히 활용하며, 적절히 가성을 넘나드는 방식을 주로 썼는데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구강 포먼트를 최대로 하고 후두를 적극적으로 올리며 댐핑을 엄청나게 줘서 드라마틱한 탁성을 유도했죠. 이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주로 쓰는 방식입니다. 또 뒤로 먹는 소리나 목을 조인 가성도 많이 썼다고 하네요. 이러한 창법의 변화로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되는 편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성대에 엄청 무리를 주는 창법으로 인해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투어는 물론이고 한 공연에서도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달렸죠.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졌다고 하네요.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 실력
솔로 앨범을 발매했던 프레디 머큐리
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과 별개로 솔로 앨범도 두 장이나 냈었다. 퀸 활동의 휴식기였던 1985년에 Mr. Bad Guy란 앨범과 1987년경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라 카바예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Barcelona’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솔로 싱글 을 커버하기도 했죠.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 팝, 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솔로 앨범을 발매했던 프레디 머큐리
에이즈로 인해 컨디션이 나빠진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와 멤버들은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 이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습니다.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레디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죠. 정확히 언제쯤에 에이즈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에이즈 전문가들과 주변 인물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때부터 프레디가 몸에 이상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고, 공연 후에는 엄청 지쳐버리는 등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에이즈로 인해 컨디션이 나빠진 프레디 머큐리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프레디 머큐리
아직까지도 프레디의 에이즈 감염 시기는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인데 에이즈라는 질병 자체가 잠복기가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팬들이 추정하는 에이즈 감염 시기는 프레디가 1982년 미국에 놀러갔을 때, 혹은 프레디가 잠시 음악에 열정을 잃고 유흥에 빠졌을 때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내놓았죠. 혹은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클럽에 드나들 때까지도 감염 시기를 넓게 잡는 의견이 있습니다. 프레디에게서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 계산을 해 보면 감염 시기는 1982년이나 1983년 사이가 유력하다고 합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HIV 보균자 검사를 받는 것을 꺼려했는데 프레디 역시 그랬죠. 하지만 동성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비밀리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측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는지 언론사 쪽에 프레디가 HIV 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바로 나버렸습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프레디 머큐리
에이즈 감염 선고를 받고 충격을 받은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 감염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의사가 처음으로 프레디에게 에이즈의 감염을 알려줬을 때, 프레디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하네요.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무척이나 싱크로율이 높은 재연 배우가 에이즈 감염을 선고받았을 당시 프레디의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차량에 마네킹을 분장시켜서 시선을 따돌린 후 자신은 나중에 다른 차량으로 나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에이즈 감염 선고를 받고 충격을 받은 프레디 머큐리
활동을 중단한 퀸
프레디 머큐리가 병에 걸림으로써 1986년을 기점으로 퀸은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프레디는 매직 투어 이후로 병색이 짙어졌으나, 1988년경까지 솔로곡으로 라이브를 계속했죠.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 앨범에서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은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하는데,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합니다.

활동을 중단한 퀸
컨디션이 나빠지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는 병색으로 인해 마르고 초췌해진 나머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였죠.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팬들을 안쓰럽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촬영한 뮤직비디오는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고 초췌해지는게 보입니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부인했지만, 되려 뮤직비디오가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컨디션이 나빠지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
에이즈 치료를 거부한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습니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 합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가수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습니다. 프레디의 병문안은 허락을 받은 몇 사람만 할 수 있었고, 엘튼은 그 중 한 명이었죠. 이는 프레디 머큐리와 엘튼 사이의 우정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이즈 치료를 거부한 프레디 머큐리
세상을 떠나기 전의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몸이 괜찮을 당시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합니다. 그의 저택에서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당시, 텔레비전에서 몇몇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내가 해도 저 정도 보단 잘하겠네라고 너스레를 떨며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하네요. 그 이후에도 디자인을 공부했던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 돼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의 프레디 머큐리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
세계를 흔들었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애니 레녹스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죠.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새로운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1997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 그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의 묘지
지난 2013년 영국 언론들에 의해 프레디의 묘지로 추정되는 묘비가 런던 켄살 그린 묘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묘비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프레디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프레디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똑같이 기재되어 있었죠. 프레디의 마지막에 대해 알고 있는 연인 메리 오스틴과 퀸 멤버들은 이 묘지가 발견된 뒤 진위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다수 팬들은 유년기를 제외하고 프레디가 평생 살았던 런던이 프레디의 마지막 안식처가 맞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추모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해당 묘비에는 팬들의 헌화가 가득했죠.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 소속되어 있던 퀸은 평론가와 리스너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밴드입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의 재능만큼은 평론가든 리스너든 모두가 인정하며, 보컬부터 작곡까지 모든 부분을 소화한 불세출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묘지
폭넓은 가창력을 소유한 프레디 머큐리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죠.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강렬한 고음을 자랑하는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의 노래에서는 프레디를 능가하는 소화력을 지닌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습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폭넓은 가창력을 소유한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
프레디 머큐리는 엘비스 풍의 로큰롤부터 레드 제플린 풍의 하드 록, 심지어 오페라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그에 걸맞는 보컬을 소화할 수 있었던 세계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대중들과 평론가들 모두 프레디를 보고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넓은 소화 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죠. 1985년도 브라질 리우에서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했던 것은,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 첫째날 콘서트에서는 그 어렵다는 섬바디 투 러브를 전성기급으로 불러냈다고 하네요!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2옥타브 라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멋진 모습을 보여줬죠. 그리고 찾아온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었습니다. 멋진 목소리와 공연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던 프레디 머큐리, 그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억될 것 입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